Satie, Gymnopedie

Open/Open_1 2015. 3. 17. 13:33

Alfred Eric Leslie Satie, Gymnopedie No.1 Lent et Douloureux 느리고 비통하게

Daniel Varsano, piano / Philippe Entremont

 

Alfred Eric Leslie Satie, Gymnopedie No.2 Lent et Triste 느리고 슬프게

Daniel Varsano, piano / Philippe Entremont

 

Alfred Eric Leslie Satie, Gymnopedie No.3 Lent et Grave 느리고 장중하게

Daniel Varsano, piano / Philippe Entremont

 

Alfred Eric Leslie Satie, Gymnopedie No.1~No.3

 

Alfred Eric Leslie Satie (Honfleur, 17 May 1866 -- Paris, 1 July 1925) was a French composer and pianist. Starting with his first composition in 1884, he signed his name as Erik Satie.

Satie was introduced as a "gymnopedist" in 1887, shortly before writing his most famous compositions, the Gymnopédies. Later, he also referred to himself as a "phonometrograph" or "phonometrician" (meaning "someone who measures (and writes down) sounds") preferring this designation to that of "musician," after having been called "a clumsy but subtle technician" in a book on contemporary French composers published in 1911.

In addition to his body of music, Satie also left a remarkable set of writings, having contributed work for a range of publications, from the dadaist 391 to the American Vanity Fair. Although in later life he prided himself on always publishing his work under his own name,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he appears to have used pseudonyms such as Virginie Lebeau and François de Paule in some of his published writings.

Satie was a colourful figure in the early 20th century Parisian avant-garde. He was a precursor to later artistic movements such as minimalism, repetitive music and the Theatre of the Absurd.

 

The Gymnopédies, published in Paris starting in 1888, are three piano compositions written by French composer and pianist, Erik Satie.

These short, atmospheric pieces are written in 3/4 time, with each sharing a common theme and structure. Collectively, the Gymnopedies are regarded as the precursors to modern ambient music[citation needed] - gentle yet somewhat eccentric pieces which, when composed, defied the classical tradition. For instance, the first few bars feature a disjunct chordal theme in the bass - first, a G-major 7th in the bass, and then a B-minor chord, also in the lower register. Then comes the one-note theme in D major. Although the collection of chords at first seems too complex to be harmonious, the melody soon imbues the work with a soothing atmospheric quality.

Satie himself used the term "furniture music" to refer to some of his pieces, implying they could be used as mood-setting background music. However, Satie used this term to refer to only some of his later, 20th century compositions, without specific reference to the Gymnopédies as background music. From the second half of the 20th century on, the Gymnopédies were often erroneously described as part of Satie's body of furniture music, perhaps due to John Cage's interpretation of them.

 

[from Wikipedia]

 

에릭사티(Eric Satie)의 연인, 수잔 발라동

 

     

수잔 발라동과 그녀의 아들 (왼쪽은 잘린 부분)

(잘린 왼쪽 부분은 사티가 개줄을 잡고 있는 모습인데, 수잔이 찢은 것으로 알려짐.)

 

30년 뒤에야 배달된 러브레터 [\]

 

에릭 사티와 쉬잔 발라동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에릭 사티가 예술가로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죽은 지 38년 만이다. 에릭 사티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닌 것은 가난과 독신이었다. 그는 평생 '무슈 르 포브르' 즉, '가난뱅이 씨'라고 불릴 만큼 가난했으며 단 한 번의 연애를 끝으로 독신으로 살았다.

묻혀 있던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프랑스 영화감독 루이 말이었다. 1963년, 루이 말 감독은 자신의 영화 <도깨비불>의 영화음악으로 사티의 피아노 곡을 사용했다. 영화가 개봉되자 '정신이 아찔해질 만큼 아름다운 이 음악은 대체 누가 작곡한 거지? 뭐? 사티라고? 도대체 그가 누구야?' 하며 전 세계가 깜짝 놀랐다.

마치 두껍고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는 계단을 올라가듯 툭툭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 <짐노페디>나 <그노시엔>. 큰 소리로 외치는 게 아니라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피아노 소리. 에릭 사티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파리 몽마르트르로 이사 온 시골 청년 사티는 술집에서 피아노를 치며 곤궁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술집에서 처음 쉬잔 발라동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 당시 이미 유명했던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때 사티는 절대로 겁먹을 것 같지 않은 야생의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보며 '섣불리 손댔다가는 깨물릴 것 같군' 하는 생각을 한다. 쉬잔 역시 로트레크의 어깨 너머로 사티를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만난 건 2년 뒤의 일이다.

그가 한평생 사랑했던 여자, 쉬잔 발라동. 화가 툴루즈 로트레크와 르누아르, 퓌비 드 샤반의 모델이며 그들의 연인이기도 했던 쉬잔. 사티는 그녀를 사랑했다. 사티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둘의 모습은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사티가 몽마르트르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소년 위트릴로는 쉬잔이 열여덟 살 때 낳은 사생아다. 사티가 쉬잔과 사귈 때, 사티의 집 문 앞에다 사티가 좋아하던 떠돌이 개를 죽여 상자에 담아 놓아두었던 소년. 그러나 먼 훗날, 부자와 결혼을 앞둔 쉬잔을 두고 사티가 몽마르트르를 떠나려고 할 때 함께 가게 해 달라며 사티에게 매달렸던 소년. 그 소년이 훗날 '몽마르트르의 화가'라고 불렸던, 몽마르트르에서 살고 몽마르트르에서 죽은 화가 위트릴로이다.

그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지만 쉬잔은 평생 그를 냉대했다. 그러나 위트릴로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위트릴로는 어머니 쉬잔을 사랑했고 쉬잔은 사티를 사랑했고 사티는 일곱 살 때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사티와 쉬잔이 헤어진 건 어머니 때문이다.

르누아르의 모델을 하면서 그의 그림을 흉내내기 시작하며 화가의 꿈을 키워 가던 쉬잔은 사티에게 모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한다. 그들의 동거는 반년 동안 지속된다. 어느 날 쉬잔과 사랑을 나누고 있던 사티는 맞은편 거울 속에서 벌거벗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벌거벗은 쉬잔이 “당신, 갑자기 왜 그래요?”라며 묻는다. 그날 이후로 사티는 쉬잔과 육체적인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되었다.

사티의 초상화를 완성한 쉬잔이 슬픈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걸 그릴 때 내 몸과 마음이 참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어쩐지 이건 내가 그린 게 아니라, 내 몸 속에 들어온 당신 어머니가 그린 것 같아요.”

헤어지고 두 달 뒤 사티는 쉬잔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소.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이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오.'

그 뒤 사티는 애달프고 슬픈 음악들을 계속 작곡하였지만 한동안 압생트라는 독한 술에 빠져 살았다. 쉬잔은 그녀의 소망대로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로 성공했다. 사티는 59세에 죽었다. 그가 죽은 뒤 아르크에 있던 그의 방에서 부치지 않은 편지 한 묶음이 발견되었다. 수신인은 모두 쉬잔 발라동이었다.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있었다.

쉬잔과 그의 아들 위트릴로와 개 한 마리가 나란히 있는. 그리고 뒷면에는 '사랑스러운 쉬잔 발라동의 사진'이라는 사티의 고딕 필체가 남아 있는. 이 사진 속에 사티는 보이지 않는다. 사티가 죽은 뒤 이 사진을 건네받은 쉬잔이 개줄을 쥐고 있던 맨 왼쪽 사티의 모습을 도려낸 것이다.

30여 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겨우 배달된 사티의 편지를 받은, 61세의 유명인사 쉬잔은 이렇게 고백한다. “솟아나는 추억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지만….”

그 말줄임표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 숨겨진 의미 때문에 쉬잔은 사진 속 사티의 모습을 도려내 버렸던 것일까.

쉬잔을 떠올리며 작곡할 때, 사티는 생각했다. 쉬잔을 육체적으로는 소유할 수 없었지만 예술적으로는 가질 수 있다, 라고. 결국 쉬잔에 대한 사티의 예술적 소유는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티의 음악, 즉 예술로 승화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연애. 사티가 쉬잔을 만난 건 그의 나이 스물일곱 살 때였다.

필자 : 조경란님 소설가
출처 : 월간《좋은생각》 2003년 01월호

(소설가 조경란 님은 소설집에 《불란서 안경원》 《나의 자줏빛 소파》《코끼리를 찾아서》를 비롯해, 장편 《식빵 굽는 시간》 《가족의 기원》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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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文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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